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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 전통을 지닌 고장, 동대문구

역사의 향기어린 서울의 동교

백제 건국초의 하북위례성(河北慰禮城)의 위치에 관해서는 여러 가지 학설이 혼재하여 아직 정설 또는 통설이라고 할만한 것이 없다. 그러나 이제까지 하북위례성의 위치를 모색 또는 고증한 여러 학자중의 반수이상이 삼각산 동록(東麓) 그 중에서도 특히 중랑천 일대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한 주장이 가장 강하다는 점으로 미루어 서울의 동교(東郊), 지금의 동대문구 지역은 옛날부터 천연의 수어지(守禦地)이며 동시에 많은 인구를 부양할 수 있는 비옥한 토지였음을 알 수가 있다. 그리하여 고려시대에는 동대문지역의 동북일대가 남경(南京)의 후보지로 거론되기도 했다.

서울 도성(都城)이 축조되게 된 시초는 조선왕조가 건국되고 한양에 정도(定都)한지 겨우 1년 반도 안되는 태조5년(1396년) 정월부터의 일이다. 이때 도성에는 모두 8개의 대·소문(大·小門)을 설치하였는데 그중 세 개는 대문(大門)이고 다섯 개는 소문(小門)이었다. 그리고 3개 大門에 위계(位階)가 있었으니 첫째가 숭례문 (崇禮門;南大門)이었고 두번째가 흥인문(興仁門:東大門)이었다. 예(禮)를 숭상(崇尙)한다는 뜻의 남대문에 대한 대칭(對稱)으로 동쪽의 大門은 인(仁)을 흥(興)하게 한다는 뜻의 명칭이었다. 그러나 흥인문(興仁門) 또는 흥인지문(興仁之門)이라는 이름으로 이 문(門)을 부르는 사람은 거의없고 모두가 속칭인 동대문이란 이름으로 부르게 되었으니 아마동대문이라는 이름은 전국 방방곡곡에 즉시로 퍼져 나갔을 것이다. 또 한가지 특기할 것은 서울이 아닌 지방의 큰 고을에도 성문이 있어 남문이니 동문이니 하는 이름으로 불리워지고 개중에는 개성의 경우처럼 남대문이라는 것도 있기는 하다. 그런데 어떤 지방에 가도 동문(東門)을 동대문이라고 불리워지는 예는 없다. 그러므로 동대문이란 지명은 온 나라 안에 단 한 개밖에 없는 고유명사가 된 것이다.

조선왕조시대, 이 동대문을 나서면 강원도일대로 통했고 혹 삼남지방(三南地方)으로 가는 사람들 중에도 이 문을 나서서 한강 뚝을 따라 살곶이다리를 건넜으며 북쪽 함경도로 가는 이중에도 동소문(東小門)을 택하지 않고 동대문에서 안암동·종암동의 길을 택하는 자도 있었다.

해가 동쪽에서 뜨기에 동녘은 예나 지금이나 모든 사람의 고향이고 또 그곳이 비옥한 땅이면 농경사회의 중심이 되기 마련이다. 조선왕조를 건국한 태조 이성계가 자신의 능묘(陵墓)인 동교(東郊)의 끝에서 찾아 「근심을 잊게 되었다」(忘憂)고 했고 조선왕조 마지막의 능묘(陵墓)도 동교(東郊)가 끝나는 자리에 섰으니 모두가 동방숭앙사상(東方崇仰思想)의 발로(發露)였었다.

도성(都城)밖 동교(東郊)가 마음의 고향이었을 뿐 아니라 이곳이 또한 대단히 비옥한 땅이었기 때문에 왕실에서 신농씨(神農氏)에게 제사지내는 선농단(先農壇)이 동대문에서 도보 30분거리에 설치되었으며 이 선농단제(先農壇祭)는 이 나라가 일제의 완전식민지가 되어버리기 3개월 전인 융희(隆熙) 4년(1910) 5월5일까지 이어지고 있다. 참고로 융희3년(1909년) 4월5일에 선농단하(先農壇下) 동적전(東籍田)에서 거행된 순종황제의 친경(親耕)때 모였던 백성들이 부른 친경가(親耕歌)의 1절(모두3절)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융희(隆熙) 3년 春 4월5일이라 선농단하 동적전(東籍田) 친임(親臨)하시와 천하대본 농사로 세우오야 만민이 표준으로 미시는 장가 삼천리강산 이리로 개간(開墾)일세. 농상증(農桑增) 호구증(戶口增) 융희만만세(隆熙萬萬歲)

오늘날 동대문구의 범성(範城)은 그렇게 넓지 않으며 지난날 동대문구 관내에 있던 동대문도 동묘(東廟)도 이제는타구 관내에 속하게 되었다. 그러나 동(東)에는 리문(里門)의 옛 유적터가 있고 사도세자의 처음 무덤터였던 배봉산이 있으며 홍릉의 울창한 숲과 세종대왕기념관, 청량사, 선농단지 등등 관내에는 역사의 향기어린 곳이 허다히 산재하여 오랜 전통을 지닌 동교(東郊)의 자리를 굳게 지키고 있다.

새로운 모습으로의 승화(昇華)를 향하여

이 지구상의 모든 지역은 그 지역마다의 특색있는 얼굴을 지니고 있다. 서울의 경우만 보더라도 같은 사대문 안이지만 종로와 중구의 모습이 판이하게 다름을 알 수가 잇다. 또 같은 성(城)밖이지만 동대문 지역과 서대문지역의 모습이 전혀 달라 각각 그 특색을 지니고 있다. 동대문구에 바로 이웃해 있는 성동구·성북구와 동대문구의 모습이 전혀 다르고 중랑천을 사이에 둔 중랑구와 동대문구의 모습은 처음부터 비교가 되지를 않을 정도로 다르다. 조선왕조시대 말까지의 모습은 성북지역·동대문지역·성동지역간에 별로 큰 차이가 나지를 않았다. 성북구에는 북한산이 있었고 동대문구내에는 그렇게 큰산이 없었다는 차이는 있지만 그러한 점을 빼면 대동소이한 평화로운 농촌지역이었다. 그 모습들이 달라지는 것은 개화기·일제시대 이후의 일이다. 다 같은 서울의 동교(東郊)이면서 성북이나 성동에 비해 동대문지역은 훨씬 빨리 개화되었고 그러므로 훨씬 빠르게 발전해간다.

동대문구에 개화의 물결이 물리적인 형태로 들어오는 것은 우선 명성황후의 국장(國葬)과 능묘(陵墓)가 설치되는 1897년부터의 일이고 이 홍릉(洪陵)이 있었기에 고·순종 양황제의 잦은 능행(陵行)이 있었으며 또 1899년 5월 18일(4월 초 8일)에는 이나라 최초의 전차가 청량리까지 통하게 된다. 당시의 서울거리에는 몇대의 자전거와 인력차가 달리고 있을 뿐이고 한 대의 마차도 없었고 하물며 자동차라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시대였으니 천지개벽에 가까운 사실이 현실로 나타난 것이다. 답십리에 전차가 들어간 것이 1914년이었고 성북구의 중심인 돈암동에 전차가 들어간 것이 1941년이었으니 신설동, 청량리가 얼마나 빨리 개발되기 시작한 것인가를 추측하고도 남음이 있다.

근대적인 가로수가 동대문 밖에서부터 청량리까지 심어진 것도 1890년대의 후반기였고 그것은 한반도 전역을 통하여 최초의 일이었다. 경원선이 개통됨에 따라 청량리역이 영업을 시작한 것이 1914년이었고 경춘철도의 성동역이 영업을 개시한 것은 1939년이었다. 지금 미주아파트가 들어서 있는 자리에 경성제국대학 예과건물이 준공되어 시업식(始業式)을 거행된 것이 1924년 5월 10일이었고 신설동에 종연방적주식회사 경성공장이 입지한 것이 1925년 11월이었으며 역시 신설동에 경성경마장이 설립되어 낙성식을 거행한 것은 1928년 9월이었다.

광복후의 변화, 인구집중현상은 서울시내 전역에 걸친 공통적인 현상이었지만 그중에서도 동대문구 관내에의 인구집중은 매우 초기에 그것도 대량으로 진행하게 된다. 1960년대의 말에는 이미 신설·용두·제기·전농·청량리 등 각 동에는 거의 공지를 찾아볼 수 없을 만치 주택이 빽빽히 들어서게 되었고 이 경향이 1970년대 전반기에 들어서는 답십리·휘경·회기·이문 등 각 동에도 똑같이 전개되고 있다. 답십리·전농·휘경·회기·이문 등 각 동에 인구가 이동하고 주택이 들어서고 할 당시의 속도는 너무나 빨라서 미처 서울시가 계획적인 개발, 예컨대 구획정리사업등을 전개할 겨를이 없었다. 그것은 청량리역을 중심으로 한 이 일대가 교통면에서나 교육면에서 서울시내의 다른 지역에 비해 대단히 편리했기 때문에 빠른 시일내에 대량인구의 집적·정주가 가능했던 것이다.

그러나 1960년대 후반에서 1970대에 들어선 이들 대량의 주택들은 물론 예외가 있기는 하나 그 대다수는 30평 정도의 대지에 20평 정도의 건물들, 이른바 「집장수 집」으로 점거되어 있어서 소득수준이 6천달러를 넘어 1만달러를 향하고 있는 현재의 시점에서는 거의 모두가 재개발되어야 할 처지에 있다.

물론 동대문구 관내에도 구획정리수법에 의하여 새롭게 개발된 지역이 없는 것은 아니다. 지난날 경성경마장이 소재했던 신설동일대에 동대문지구 구획정리사업이 실시된 것은 1960년대의 전반기였으나 이미 30년전의 일이라서 그 건물들의 거의가 재개발되어야 할 시점에 있는 실정이다. 장안평지구 구획정리사업이 실시된 것은 1970년대의 후반기에서 80년대의 초에 걸쳐서였으니 이 지역만은 신개발지로서 타 지역에 비해 손색이 없으나 불행히도 그 범역이 협소하여 동대문구 전체의 모습에 큰 변화를 가져 올 정도의 비중을 차지하지 못하고 있다.

산업면에 있어서도 사정은 동일하다. 경성시장에서 청량리시장까지, 그리고 그남쪽의 수산시장·청과물 도매시장은 그 규모면에 있어서나 거래량에 있어서 그리고 그것이 다루는 상품의 다양성 등에 있어서 가히 한국 최고 또는 한국을 대표하는 지위에 있다. 「서울 청량리역 근처 경동시장」의 이름을 모르는 한국인은 아마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불행히도 경동시장이 재래식 시장의 대표일 수 있어도 근대식 시장의 범주에 들어가지는 않는다. 한마디로 동대문구 관내의 주택과 산업시설은 거의 모두가 초로의 상태에 접어들었거나 그 상태를 넘어 서려고 하고 있다. 전통이 있기에 그리고 빨리 개발되었기에 처해진 당연한 결과인 것이다.

다행히 동대문구 관내 주거지역 도처에서 현재 재개발을 향한 거센 물결이 일어나고 있다. 아마도 앞으로 10년 내지 20년내에 이 지역 일대는 전혀 새로운 모습으로 탈피되고 승화될 것으로 예측할 수 있다. 그리고 그러한 예측을 가능하게 해주는 밑바탕에 관내 50여만 주민의 강한 주민의식이 뒷받침되어 있는 것이다.

동대문구 일대가 화려하게 변신(變身)함으로써 아름답고 살기좋은 환경이 마련될 미래를 향하여 오늘도, 또 내일도 착실한 발걸음을 옮기기로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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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길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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